p 28 

"그렇게 사이좋았다는 다섯 명 그룹은 어떻게 됐지?"

쓰쿠루는 땅콩을 한 움큼 손바닥에 올리고 몇 개를 입안에 넣었다.

"우리들 사이에는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암묵적인 룰이 있었어. '가능한 한 다섯이서 같이 행동하자'라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어. 이를테면 누군가와 누군가가 둘이서만 뭔가를 하는 건 가능한 한 피하도록 하자.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룹이 흩어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하나의 구심적인 유닛으로 존재해야만 했지.

뭐라고 하면 좋을까, 우리는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 같은 걸 유지하려 했던 거야."

 "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 그 물음에는 순수한 놀라움이 배어 있었다.

 쓰쿠루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고등학생이니까 이런저런 이상한 생각도 하는 거지."

사라는 쓰쿠루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그렇지만 그 공동체에 무슨 목적 같은 게 있었던 거야?"

"그룹의 기본 목적은 아까도 말했듯이 학습 능력이나 학습 의욕에 문제가 있는 어린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거였어. 그게 출발점이었고, 물론 그건 우리에게 계속해서 변함없이 소중한 의미였지.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을지도 몰라."

 "그렇게 존재하고 존속되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아마도."

사라는 눈에 힘을 주어 가늘게 뜨고 말했다. 

 "우주처럼."

 "우주에 대해서는 잘 몰라. 그렇지만 그때 우리는 그게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했어, 우리 사이에서 일어난 특별한 케미스트리를 소중히 지켜 가는 것. 바람 속에서 성냥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처럼."



p 340

 "우리 모두는 온갖 것들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 이윽고 에리가 입을 열었다. "하나의 일은 다른 여러가지 일들과 연결되어 있어. 하나를 정리하려 하면 어쩔 수 없이 다른 것들이 따라와. 그렇게 간단하게는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몰라. 너든, 나든."

 "물론 간단히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얼렁뚱땅 내벼려 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기억에 뚜껑을 덮어씌울 수는 있다. 그러나 역사를 숨길 수는 없다. 내 여자 친구가 한 말이야."

 에리는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가 창을 들어 올려 열었다. 그런 다음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바람이 커튼을 흔들고 탁, 탁, 보트 부딪히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옆으로 쓸고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서 쓰쿠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 가운데는 완전히 굳어 버려서 벗겨낼 수 없는 뚜껑도 있을지 몰라."

 "억지로 벗겨 낼 필요는 없어. 거기까지 바라는 건 아냐. 하지만 그게 어떤 뚜껑인지 정도는 내 눈으로 보고 싶어."

 에리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두 손을 보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두툼했다. 손가락은 길고 손톱은 짧았다. 그는 그 손가락이 물레를 돌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내 겉모습이 아주 많이 변했다고 말했지. 물론 나도 많이 변했다고 생각해. 16년 전 그룹에서 추방당한 뒤 나는 한동안, 다섯 달에 걸쳐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어. 정말로 심각하게 그것만 생각했어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었어. 거창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로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갔다고 생각해. 아슬아슬한 끝자락까지 가서 안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눈을 뗄 수 없게 되고 만거야. 그렇지만 어떻게든 원래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어.

그때 진짜로 죽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어. 지금 생각하면,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것 같아. 노이로제인지 우울증인지, 병명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때 내 머리는 정상이 아니였어. 그건 분명해. 그런데도 혼란에 빠진 건 아니었어. 머리는 아주 맑았어. 잡음 하나 없이 고요했지. 그건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이상한 상태였어."

 쓰쿠루는 침묵하는 에리의 두 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다섯 달이 지나고 내 얼굴은 전과 많이 달라져 버렸어. 가지고 있던 옷을 거의 입을 수 없을 만큼 체형이 달라졌지. 거울을 보니 내가 나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어. 물론 우연히 인생의 그런 시기를 만난 것일 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건 내 머리가 정상에서 벗어날 시기였고, 얼굴이나 신체가 크게 변하는 시기였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계기가 된 건 내가 그룹에서 버림 받았다는 사실이었어 그 일이 나를 크게 바꿔 버린 거야."

 에리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쓰쿠루는 말을 계속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마치 항해하는 배의 갑판에서 밤바다 속으로 갑자기 혼자만 떠밀려 빠져 버린 듯한 기분이었어."

 그렇게 말하고 쓰쿠루는 그 말이 얼마 전 아카가 입에 담은 표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한 호흡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 누군가에게 떠밀린 건지, 아니면 제 멋대로 떨어져 버린건지, 그건 잘 몰라. 아무튼 배는 항해를 계속하고 나는 어둡고 차가운 물 속에서 갑판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봐. 배 위에서는 아무도, 승객도 선원도 내가 바다에 빠졌다는 것을 몰라. 주위에는 붙잡을 것도 없어. 그때의 공포를 난 지금도 품고있어. 자신의 존재가 느닷없이 부정당하고, 영문도 모른 채 홀로 밤바다 속에 내팽개쳐지는 공포. 아마 그 때문에 나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었을 거야. 다른 사람과 나 사이에 늘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지."

 그는 테이블 위에서 두 손을 좌우로 벌리고 30센티미터 정도의 폭을 만들었다.

 "물론 그런 것도 타고난 성향일지 몰라. 남과의 사이에 본능적으로 완충 공간을 두게 되는 경향이 원래 내 속에 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너희하고 같이 있을 때에는 그런 거리 같은 건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 적어도 나는 그렇게 기억해. 벌써 아주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지만."

 에리는 두 손바닥을 볼에 대고 세수라도 하듯 천천히 문질렀다. "16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넌 알고 싶은 거구나. 모든 사실을."


p 435

 날짜가 바뀌기 전에 침대에 들어가 머리맡의 불을 껏다. 사라가 등장하는 꿈을 꾸면 좋으련만, 하고 쓰쿠루는 생각했다. 에로틱한 꿈이라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가능하면 그리 슬프지 않은 꿈이 좋다. 그녀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꿈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어차피 꿈이니까.

 그의 마음은 사라를 갈구했다. 그렇게 마음으로 누군가를 우너한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쓰쿠루는 그것을 강하게 실감했다.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이것이 처음인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것이 멋지지만은 않다. 동시에 가슴앓이가 있고 숨 막힘이 있다. 두렵기도 하고 어두운 울렁거림이 있다. 그러나 그런 고통조차도 지금은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그는 지금 자신이 품은 그런 기분을 놓쳐 버리고 싶지 않았다.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그 온기를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걸 잃어버릴 거라면 차라리 자기 자신을 잃어 버리는 편이 낫다.

 "있잖아, 쓰쿠루, 넌 그 여자를 잡아야해. 어떤 일이 있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지금 그 여자를 놓쳐버리면 다시는 아무도 가질 수 없을지도 몰라"

 에리는 말했다. 맞는 말일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라를 손에 넣어야 한다. 그것도 그는 안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마음과 또 다른 한 사람의 마음 사이의 문제인 것이다. 주어야 할 것이 있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 있다. 아무튼 모든 것은 내일 일이다. 만약에 사라가 나를 선택하고 받아들여 준다면 바로 결혼하자고 말하자. 그리고 지금 자신이 내줄 수 있는 것을, 그것이 무엇이든, 몽땅 내밀자. 깊은 숲에서 길을 잃고 나쁜 난쟁이들에게 붙잡히기 전에.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그것이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그러나 그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고 잠들었다. 의식의 꼬리에 매달린 빛이 멀어져 가는 마지막 특급 열차처럼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작아지더니 밤 가운데로 빠져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자작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블로그를 시작한 이후 이렇게 책 내용을 길게 쓴 적이 있었나 싶었다.

공부를 하는 도중이고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 아침 저녁으로 조금씩 읽었다가, 

어제 폭발하듯 읽어 내렸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리고, 머리도 어지러워 마치 마약이라도 한 방랑자 같은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책 안에 쓰쿠루는 나였고, 나는 책 속에서 나의 과거를 정리하려 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 책에 빠져 숨쉬는 것 조차 잊을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책을 처음 접한 충격이 너무 컷다.

그의 책 안에서 영화 데몰리션의 주인공처럼 나는 나를 분해해서 다시 조립했다.

해답을 알고 싶었기에. 답은 내 안에 있음을.


책은 따뜻함과 차가움을 넘나들며 초가을 소풍가듯 나를 안내했다.

쓰쿠루의 어린시절 완벽한 모임의 구성원들을 소개하는 이야기부터 그가 상처받고 그 상처를 회복해 가는 이야기

상처를 자신의 마음속 어느 한 구석에 숨겨두고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발견한 사라로 인해 곪아서 고름이 흘러나오는 상처와 마주할 운명에 놓인다.스쿠루는 천천히 고름을 닦아내고 상처에 약을 바른다.

상처에 바를 수 있는 완벽한 약은 책에서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스쿠루 스스로 그 약을 제조하고, 여러번 시험해가며 결국 자신의 상처를 보듬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차분히 이끌어 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인상은 그런 참을성 있는 백발 노인 같은 작가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