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13 - 14


아버지는 자동차를 수리해야 했다며 다음날 정오 무렵에 왔다. 얼굴이 낯설게 보인 것은 이발을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류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미 의심이 시작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사실이라고 믿어버리고 싶은 마을을 물리치기가 가장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자존심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인생을 자기가 아는 방법으로 보전하려는 의지였다. 그녀는 자기가 의존해온 틀을 지키려는 어리석은 긍정과 교활한 평화가 어떻게 사람들을 보수적인 이데올로기 안으로 끌어들이며 또한 자신조차 신뢰하지 않는 채로 그것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데 앞장서게 만드는지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의심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상처받지 않으려면 의심스러운 것을 의심하지 않아야 했다.

그 생각은 오랫동안 쥐고 있던 소중한 무언가가 손안에서 여지없이 바스러지는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찔렀다. 언제 또 시동이 꺼질지 알 수 없는 자동차에 실려 흔들리며 말없이 앞만 바라보던 어머니는 불현든 손을 들어 왼쪽 가슴에 갖다댔다. 


낯설어진 세계, 그리고 사랑의 상실에 조의를 표한 셈이었다.


 

p 170 - 171


J는 자신이 소설가라는 사실을 내세우기 싫어했다.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앞세워 원고료를 올리라는 주변의 충고를 모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J는 자신이 누구로 죽을지 까지 선택할 수는 없었다. 


산 사람들이 씌운 불우한 소설가라는 멍에와 그 불우함에 던져지는 호의를 거절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중략..


추모의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J가 사회적 약자이자 불운한 인간으로서 알코올중독으로 비참한 생을 마감했다는 건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 되어갔다. 더구나 그런 말을 하는 무리는 삶을 세속적 기준으로 재단하지 말고 사랑이라든가 그리움이라든가 평화, 그런 것과 얼마나 가까운가로 평가하자고 글을 써대는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요셉의 머릿속에는 이 자리야 말로 J가 죽임을 당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어떤 분야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내리고 강자와 약자를 가르는 현상적 이분법, 그리고 결과만으로 인간을 재단하는 세속적 패턴은 요셉에게 차라리 익숙했다. 


요셉이 역겨운 것은 발언권 없는 죽은 자를 이분법적 틀에 집어넣어 루저로 만들어놓고 그를 동정함으로써 자신들이 공의의 편에 서 있다고 믿는 자들의 기만적 패턴이었다.




p 246


류가 술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이제야말로 화장실에 들어간 요셉은 오줌을 눈 뒤 세면대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어깨 위의 눈을 천천히 떨어내고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올려 정수리의 빈곳을 가렸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가려던 요셉은 문득 걸을을 멈추었다. 거울 앞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십년 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가서 십년 뒤의 자신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거울 속의 남자는 자신이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낯선 남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십년이라는 시간 너머 어딘가에 실이 끊어진 채 버려진 타래를 끌어당겨올 만한 힘이나 욕망은 전혀 없어 보였다.


화장실을 나온 요셉은 계단의 어둠속세 서서 오들오들 떨며 시간을 보냈다. 

눈발이 점점 굵어졌다.

얼마 뒤 류가 다시 급정지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나왔다.


류가 쏟아지는 눈발을 뚫고 골목 저편으로 사려져갈 때 몇번인가 이름을 부르며 달라가려 했지만 요셉의 몸은 점점 얼어붙어갈 뿐이었다.



【 

은희경작가의 첫 소설은 구절구절이 시처럼 느껴졌다.

사실 부드럽게 읽혀진다기 보다는 문장을 꼭꼭 씹어서 읽어야 할꺼 같아. 

생각보다 오래 읽었다.


단어하나하나에 너무 힘을 준 소설이 아닌가 했다.

작가가 포기하듯 쓴 소설이라고 적기도 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작가 자신의 신념을 신중하게 한자한자 적은 소설로 느껴졌다.


내용은 재미있었다. 

정작 주인공인 류의 이야기가 거의 없어 아쉬운점을 빼면? 


최근 내가 읽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와 비교하자면 쉴틈이 많은 여유 있는 소설로 읽혀졌다.

'채식주의자'는 내가 너무 고통스럽게 읽어서 그럴지도..

쉴틈은 주지않고, 읽기 싫어도 읽어야 하며, 다 읽고 나서도 책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해서 고생했다.


요 며칠 책에 빠져 살고 있는데, 

몇년만에 접해보는 한국 소설이 이렇게 재미있었나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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